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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본 사람들Ⅳ(마16:13-20) - 베드로 - 2026.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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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본 사람들Ⅳ(마16:13-20) - 베드로 -        2026. 1. 25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Simon)이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두 번째 이들인 시므온과 같은 이름이다. 히브리어로 시므온이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라는 뜻이다. 응답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셨다. 헬라어로 반석을 뜻하는‘페트로스’(Πέτρος)이다. 베드로(peter)란 예수님이 주로 쓰시던 아람어로‘게바’(Cephas)라고 한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하루는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가셨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 가까이에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였다. 게네사렛이란 갈릴리 호수를 말한다. 그날 호숫가에는 배 두척이 가까이에 있었다. 어부들은 부지런히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다. 그리고 해변가에 둘러 선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을 가르치셨다. 말씀을 마치신 후에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명령하셨다. 베드로는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지만 별로 잡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물을 내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곁에 있는 다른 배에까지 잔뜩 나누어 실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아 올렸다. 두 배 모두 배가 물에 잠기려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물고리를 잡은 것이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리고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 그의 곁에 함께 있던 동업자인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모두 다 놀라워 하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향하여 “놀라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저들은 그날 배들을 해변가에 대 놓고는 그렇게 많이 잡은 물고기와 그물 등 모든 어업용 장비들을 버려 둔채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생활이 날과 달을 더해 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다. 그곳은 특별히 우상 숭배가 심각한 곳 중의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날 그 곳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질문과 그에 대하여 제자들이 대답하는 본문의 내용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깨닫는 아침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 사람들의 반응.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예수님 자신이 자기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을 몰라서 물으셨을 리가 없다. 아마도 이는 예수님 자신을 향한 제자들의 깨달음 정도를 묻기 위한 질문이셨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은 서로 나서서 대답하였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나이다”


왜, 세례 요한일까. 마태복음 14장 2절에 보면, 그 당시 헤롯 안디바 왕 조차도 “예수님을 자신이 목 베어 죽인 세례 요한이 부활체로 이 세상이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인기의 절정에 있던 세례 요한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연 이어서 예수님의 사역이 소문에 소문을 계속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는 왜 엘리야라고 여겼을까. 열왕기하 2장 21절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창세기의 에녹과 함께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말라기 4장 5절에 보면,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출현할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마태복음 11장 14절에 보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말라기 4장에서 예언하신 엘리야의 등장으로 설명해 주신 적이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혹시 예수님이 말라기에서 말한 ‘장차 오시리라’ 라고 예언한 엘리야가 아닐까”라고 여기고 있었다. 


예레미야일 것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예레미야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데도 회개하려 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던 선지자였다. 예수님이야말로 나중에 예루살렘을 바라다 보시며 울며 기도하시던 주님이셨다. 또한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반응도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모세를 언급한 것일 수 있다. 이는 신명기 18장 15절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라는 말씀에 근거한다.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길 원하였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고 경제적인 수탈로부터 벗어 나게 할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다. 벳세다 광야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많은 무리를 배 불리 먹게 한 그 날 백성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요6:14)라고 입을 모았다. 


요즘 여러분은 어떠한가. 나는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하여 보라. 



베드로의 신앙 고백.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당시까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의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베드로가 처음이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란 “주님은 우리 모두가 기다리던 메시아이십니다” 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을 왕이란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희들 가운데 다윗과 같은 왕이 탄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로 예수님은 왕 중의 왕이시며, 제사장 중의 지극히 높은 대 제사장이시며,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이 땅에 오셨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베드로는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생명의 근원이시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사야 9장 6절 말씀을 기억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하였다. 성탄절이 지난 지 한달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탄생하신 한 아기의 탄생이 무엇인지를 안다.


예수님은 기묘자요 모사이시다. 놀라운 상담자이시다. wonderful counselor 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평강의 왕이시다.

오늘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이와 같은 고백을 한 것이다. “주는 평강의 왕이시며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리다.”라는 고백을 한 것이다. 

불신과 의심의 어리석은 안개 속에 갇혀 지내지 말고 이런 믿음의 고백이 우리 각 사람에게 모두 다 주어지기를 소망한다. 


세상에 나가서 물어보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실존을 시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흔히들 “나는 무신론자다”라고 말한다. 그냥 지금 살아 있으니 이 세상의 것들을 즐기며 누리며 살아갈 뿐이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지극히 현세적이고 현실적이고 물질적이다. 지금 배 부르면 배 부른 것이고, 지금 좋으면 좋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는 뭘 먹을까 뭘 마실까 뭘 입을까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궁리에만 붙잡혀서 살아간다. 


그렇나. 생각하여 보라.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우리는 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해 주세요”라고 부탁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누가복음 12장 13절 이하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그리고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 한 부자의 비유라고 제목 붙여진 어리석은 부자 비유이다. 한 부자가 있었다. 그 밭의 소출이 풍성하였다. 속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구나. 곳간을 헐고 더 크게 늘리고 곡식을 쌓아 두어야 겠구나. 그리고 자신에게 “내가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내용은 예수님이 하신 비유의 가르침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며칠 살다가 죽고 마는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이다. 한 여름을 살다가 죽고 마는 매미와 같은 인생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하였다. 


누가 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시며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깨달아 알고 믿고 전파하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의 권세를 모두 다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예수님의 축복.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마음껏 축복해 주셨다. 


네 이름이 반석, 베드로인 것처럼 반석 같은 신앙을 고백하였구나.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줄 것이다.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언급하신 곳이 이곳이 처음이다.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란 교회는 불러낸 무리라는 뜻이다. 세상으로부터 불러 내어 주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교회라고 한다. 예배당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이 교회인 것이다. 초대 교회의 핍박을 피하여 200년 이상을 땅 속 깊은 곳에 동굴을 파고 지내던 이들이 있었다. 발견된 물길 즉 수로만도 7km가 넘는다고 한다. 올 10월에 튀르키에에 가면 그런 흔적들을 방문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땅 속 깊은 곳에 동굴을 파고 수 만명이 그런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을까. 베드로 전서 1장 1절에 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누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한다고 하였다. 거기에 언급된 지명 중의 한 곳인 갑바도기아 지역에 가면 환난과 핍박을 피하여 지하 깊은 곳에 거대한 동굴을 마련하고 신앙을 지켜간 신앙 선조들의 흔적이 끝이 없이 남아 있다. 베드로 성당이나 요한 성당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 십니다.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이 위대한 것이다. 


베드로 자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가 고백한 신앙 고백이 칭찬 받을 만한 것이다. 우리는 안다. 베드로는 자기 주장을 펼치려 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라고 엄하게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바로 뒤에 이어서 나오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하면 안된다. 자랑할 것이 없다. 대단하게 여길 것도 없다. 카톨릭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고 교황 제도를 제정해서 오늘 날에 이른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저들이 주장하는 교황 무오설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지난 2,000년 교회 역사에 잘 못된 교황이나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교황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


칭찬을 받은 베드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 고백이 중요한 것이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 고백이 있을 때에 교회가 교회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라고 질문하였다. 그렇다. 나 자신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 신앙으로 살아갈 때에라야만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예배당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으로 내가 대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내가 광야에서 지내고, 내가 동굴에서 지내고, 내가 낙타 털옷을 입고, 내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연명하며 살지라도 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 고백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예수님이 사십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마귀의 시험이 계속되었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드는 기적을 보여 주시려고 금식 기도하신 것이 아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전혀 이상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금식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절하고 천하의 절반을 얻기 위해서 금식 하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곧 그 분이시다.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우리는 <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라는 찬양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이런 신앙의 고백이 나를 이끌어 가는 성령의 힘이 되기를 축원한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축복이 무엇인가. 예수 안에서 우리는 사망 권세를 이긴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리는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오해하면 안된다. 천국 열쇠란 예수님께서 주신 복음의 말씀 그 자체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예수님의 수 많은 천국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안다. 캐톨릭에서 베드로를 초대 교황 운운하며 교황의 절대 권력과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신앙 고백 후의 베드로를 안다. 사탄이라는 엄한 책망을 받기도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던 그 날 아침,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숨어 지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 하였다.


베드로를 베드로 되게 한 힘이 무엇인가. 그는 회개하였다. 성령을 받았다. 그 후에 우리가 아는 사도행전의 사도 베드로가 된 것이다. 그렇다. 한번의 신앙 고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야 한다. 은혜가 임해야 한다. 불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복음 앞에서 열고 닫는 천국 열쇠의 권세가 베드로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지켜가는 이들인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계승되는 것이다. 


열 두 사도들 중에서 요한의 형제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장수한 요한 사도 외에는 가롯 유다를 대신하여 충원된 맛디아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일일이 다 순교자의 길을 갔다. 예수님을 바라 본 다는 것이 무엇일까. 새해를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에게 주님의 기대하시는 복음의 사람다운 믿음의 증거가 점점 더 간증으로 드러나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예수사랑 조회 14회 2026-02-0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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