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길을 준비하라(마3:1-12) 20251207 본문 주의 길을 준비하라(마3:1-12) 2025. 12. 7 구약의 마지막 선지서인 말라기 이후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오기까지의 기간을 중간기라고 한다. 400여년 동안 하나님은 더 이상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침묵기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났다. 예수의 12제자들은 대개가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은 이들이었다. 심지어는 예수님조차도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 받기를 요구하는 예수님께 당황하며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그 때 예수께서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그 때에 하늘 문이 열렸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께 임하였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장 후반부에 기록된 내용이다. 물론 이 장면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3장 21절에는 예수님께서 물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복음 전파의 내용은 한결같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한 마태복음 3장 3절에보면,“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라고 소개하였다. 세례 요한의 등장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세례 요한은 주로 광야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낙타털로 몸을 가리고 가죽 띠로 묶었다. 메꾸기와 야생 꿀인 석청으로 허기를 해결하였다. 그의 소문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사방 고을에서 그를 찾아 나섰다. 소문을 전해듣고 궁금해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조차도 광야의 세례 요한을 찾아 나섰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독설을 쏟아 내었다. 회개를 촉구한 것이다.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구약 종교의 중심 인물들이었다. 종교적인 교만에 꽉 찬 이들이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며 살아가려고 했던 나름대로 경견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바리새파라는 ‘파라쉬’가‘ 구별하다, 분리하다’라는 뜻을 가진 어쩌면 좋은 의미이다. 죄된 세상에서 자신들을 구별하여 나름 신앙적인 삶을 추구했던 것이 맞다. 그러나 그런 구별 의식이 교만으로 치닫게 된 것을 주님은 책망하신 것이다. 나중에 보면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처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마12:34)이라고 책망하신 말씀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반면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의 바탕이 어떠하여야 할지에 대하여 깨우쳐 주신 내용도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사두개파 사람들은 천국과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현세적인 출세와 성공에만 관심을 갖던 이들이었다. 모세 오경을 인정하면서도 정작은 현세적인 삶에만 지극히 관심이 많던 이들이 사두개파이다. 저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히 높은 지위와 안정된 경제생활을 하면서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던 이들이었다. 그런 저들에게 세례 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 지리라”라고 책망하였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전파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그 당시 세례 요한의 명성과 인기는 대단하였다. 세례 요한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 대하여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고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었다. 샌들을 주로 신던 그 당시에 주인의 신발 끈을 매고 푸는 것은 종들의 몫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종들은 주인이 새로 신을 신발을 예비해서 들고 뒤따라 다니기도 하였다고 하니 그런 시대적인 문화를 엿보게 하는 표현이다. 세례 요한의 곁에 찾아간 이들은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구약 시대의 죄의 자복이란 대제사장을 통해서 대 속죄일에 종교적인 행사로 치르는 것이 전부였다. 그랬던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개인적으로 죄를 자복하고 물로 세례를 받는 일은 역사에 없었던 놀라운 현상인 것이 분명하였다. 그런 일이 날마다 계속되었다. 엄청난 무리가 광야의 세례 요한 곁에 몰려 들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은 자기를 낮추고 비우며 예수님께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려 하였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소개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능력이 많으신 이.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하는 능력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능력은 무엇인가. 각색 병자를 고치는 능력,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 죽은 자라도 살리신 능력, 배고픈 자들을 배 불리 먹이신 능력,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신 능력이 예수께서 이 땅에서 보여 주신 능력이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된 예수를 죽은 자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 부활의 능력의 주인공이 되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을 죄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시는 사죄의 능력을 가진 주님이시다. 예수는 부활 후 사십일 만에 승천하였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말하는 세례 요한보다 뛰어난 예수의 능력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의 능력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 주신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명사가 아니다. 사랑은 동사이다. 예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배 고픈 자에게 먹을 것은 주지 않고 배 부르게 하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헐 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지 않고 따뜻하게 하라고 말만 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사랑은 동사이며 사랑은 실천이어야 한다. 사랑은 행동으로 옮길 때에라야만 사랑일 수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라고 말씀하셨다. 주린 자를 먹이고 목 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고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고 헐 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돌아 보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 돌보아 주는 것이 주님이 기대하시는 바이다. 예수께서는 평생 그런 삶을 사시다가 고난과 핍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다시 사셨다. 사랑은 실천할 때에 능력이 있는 법이다. 사랑의 눈길, 사랑의 눈물, 사랑의 손길, 사랑의 발걸음, 사랑이 담긴 떡 한 덩이, 사랑이 담긴 물 한 그릇에 능력이 있는 것이다. 최근 어느 선배 목사가 은퇴를 준비하면서 후임 목사가 결정되었다. 서울의 꽤나 규모가 있는 작지 않은 교회이다. 수십 명의 기라성 같은 젊은 후배 목사들이 목회하길 원했다. 나중에 3분의 젊은 목사님들이 차례대로 설교하였다. 요즘 설교 못하는 목사가 어디에 있나. 나중에는 3명의 최종 후보 목사들 중에 교인들의 반응이 나뉘었다. 절대 지지를 받은 목사님이 한 분 있었다. 그가 후임 목사로 결정 되었다. 그의 설교가 교인들을 감동시킨 것이 아니다. 미국 서부의 전임지의 한인 교회를 떠나 올 때의 일화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미국을 떠나 오기 전에 병약하고 외롭게 지내시는 할머니 권사님 한 분을 모시고 국밥 한 그릇을 대접해 드렸다. 따뜻하게 손 붙잡고 진심으로 기도해 드렸다는 간증이 교인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 것이다. 우리 가족이 1994년 1월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그 해 겨울에 미국 동부에는 역사상 기록에 없을 정도의 폭설이 내렸다. 나뭇가지에 핀 얼음 꽃의 장관을 본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필라델피아에서 뉴욕 J. F. 케네디 공항까지 눈길을 헤치고 무려 3시간 쯤 밴을 몰고 우리를 마중 오신 집사님이 계셨다. 그 분은 고려대학교 농과 대학을 졸업한 분이었다. 부인은 종합병원의 경력이 오래 된 간호사이다. 우리 가족은 미국 정착 초기에 그 남편 김항우 집사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작은 선물 보따리를 사서 들고 찾아 갔다. 10여년 동안 한결 같이 그렇게 했다.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오던 때에는 중풍으로 병약해져 있으셨다. 덩그러니 큰 집에 외롭고 쓸쓸하게 지냈다. 걸음도 시원치 못했다. 발음도 어눌해졌다. 젊어서는 축구도 좋아하고 운동도 잘 하던 그였지만 늙고 병약해지는 것을 이길 장사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오기 며칠 전에 그 집사님을 한인 타운의 식당에 모시고 갔다. 가장 비싼 음식을 골고루 주문해서 대접하고 싶었다. 맛있게 고기도 구웠다. 그러나 치아가 약하여 잘 잡숫지도 못하셨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서 집게와 가위로 구운 고기를 송송 썰어서 그 분 앞 접시에 얹어 드렸다. 그 분이 우리 가족에게 배풀어 주신 사랑에 비하며 우리가 갚은 것은 별것이 없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찾아뵙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 가족의 방문을 그렇게 반가워하고 기뻐하였다.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딘 엘머 헤스(Dean Elmer Hess, 1917-2015)는 목사이며 미 육군 항공대 소속의 조종사 출신 대령이다. 6. 25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쟁 중에 250번이나 출격했으나 살아 남았다. 그의 별명은 ‘한국 공군의 아버지’이다. 또 다른 별명은 ‘전쟁 고아의 아버지’이다. 1951년 1. 4 후퇴 당시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이 위기에 처했다. 그는 군목 러셀 블레이즈델 등과 함께 전쟁고아 구출 작전을 계획했다. 이것이 바로 '유모차 공수 작전'이다. 그는 전시 상황에서 김포 비행장에 있던 수송기들을 동원했다. 1,000여 명에 달하는 전쟁고아와 보육원 직원들을 제주도로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딘 엘머 헤스 대령은 전쟁 후에도 한국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전송가'(Battle Hymn)의 인세를 한국 전쟁 고아를 돌보는데 모두 사용하였다. 그의 헌신이 알려져서 영화도 만들어졌다.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한 출연료도 모두 다 한국의 전쟁 고아를 돌보는 보육원 운영비로 보냈다. 1969년, 대령으로 전역 후에도 20년간 한국 전쟁고아를 위한 모금 활동에 앞장 섰다. 그는 10년 전인 2015년, 97세에 눈을 감았다. 한국 공군의 기틀을 마련하고 수많은 전쟁고아의 생명을 구한 그의 헌신은 오늘날까지도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인류애의 귀감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한민국 공군은 매년 그의 공적을 추모하는 행사를 벌인다고 한다. 남들보다 능력이 많다는 것이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하여 보라. “나는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많아”라고 여기는 그 누군가가 있는가. 그러면 남보다 많은 그 능력이 어떻게 입증되어야 하는가. 남들보다 더 배웠는가. 남들보다 더 벌었는가. 남들보다 더 가졌는가. 남들보다 더 아는가. 남들보다 더 경험이 많은가. 남들보다 더 힘이 있는가. 나에게 있는 남들보다 더 뛰어난 그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섬기며 돌보며 베풀며 나누며 이웃과 열방을 마음에 품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란 사랑의 능력이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의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능력이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이.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주님이셨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도 그러하셨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내 안에 성령과 불이 임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령과 불이 무엇인가.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 강림의 현장을 바람과 불로 설명하였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성령이 임하였다. 마치도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보였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뭇가지나 나뭇잎이나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 바람의 현상을 알 수 있다. 불길을 관찰해 보라. 주방에 촛불이라도 눈여겨 보라. 어떤 해석에 의하면, 성령은 믿는 자에게 임하는 능력이며 불은 불신자에게 임하는 심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은 불과 같이 임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열정과 정열이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토기를 만드는 수고를 한다. 불가마 속에 토기를 차곡 차곡 쌓고 불을 지핀다. 가마 속 불의 온도가 1,000도에 육박한다. 아니 1,000도도 훨씬 넘는다. 그렇게 해서 고려청자와 조선시대 백자가 탄생한 것이다. 토기장이의 섬세한 손길과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고열의 불길을 거쳐서 역사적인 도자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 고난과 시련과 역경과 아픔과 실패와 실수가 없이 되는 일이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하다. 그러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연세 80세가 된 모세가 호렙산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환상을 보았다. 실제로 불이 붙은 것이 아니다. 환상을 본 것이다. 떨기나무는 광야의 앙상한 가시나무이다. 그런데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환상을 본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 즉 천사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 불길이 타 오르는 환상과 더불어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자신이 없어 하며 말이 어눌해졌다고 뒷걸음하려 하는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게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호렙산 떨기나무의 불이 붙는 듯한 환상 앞에서 부름을 받은 모세의 나중을 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 각 사람을 부르신다. 우리 각 사람이 은혜를 받고 능력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신다. 어저께 새벽에 조다윗 목사가 주관하는 비전 선교단 겨울 훈련 캠프의 아침 예배에 다녀왔다. 새벽에 가는 길은 광림 수도원 까지 한시간 10분이 걸렸다. 캄캄한 이른 아침에 수백명의 젊은이들의 찬양의 열기가 예배당에 가득하였다. 말씀에 집중하는 청년들의 눈빛이 남달랐다.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택하여 쓰신다. 조다윗 목사는 동국대학교 문예 창작과를 졸업한 문학 청년이었다. 그는 호주에 유학하고 그 곳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부르셨다. 지금 40대 후반이다. 하나님은 20년 전에 그의 20대 때인 2005년에 그의 마음에 성령과 불을 물 붓듯이 부으셨다. 20년 동안 비젼 선교단을 통해서 발굴되고 세워진 선교사가 350명이 넘는다. 현재는 2,000여명 넘는 선교사 지망생들이 전국의 10여곳의 지부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을 ‘선교동원가’라고 칭하고 있다. 맞다. “가든지 보내든지”이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감당해야하는 선교의 지표이다. 우리 예수사랑교회가 그런 교회 중의 하나가 되길 바란다. 벌어서 선교하고, 배워서 선교하고, 은혜를 받고 성령과 불을 받아서 선교에 앞장서는 그런 선교 지향적인 인물들이 계속하여 배출되는 그런 힘이 있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하고 소망한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실 이. 인생은 열매로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 지느니라 이러므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20) 그렇다. 과수나무는 열매로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잎이 무성하고 아무리 꽃이 화려했다고 해도 열매가 없다면 소용 없는 것이다. 과수나무를 가꾸는 과수원지기의 마음은 열매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주인은 누구나 다 극 상품의 좋은 열매가 맺기를 원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2장 21절에 보면,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 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됨이냐”라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대하게 된다.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딸인 성도들이 세상에서 죄를 멀리하고 악을 경계하며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라고 하였다. 시골에서 농사할 때에 보면 콩과 같은 것들을 도리깨로 친다. 콩알을 거두어서 키로 친다. 바람개비의 바람 앞에 떨어 트려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한다. 틈실한 알곡와 형편 없는 것들이 구분된다. 농부는 콩 한 톨, 들깨나 참깨 한 톨도 소중히 여긴다. 그 모든 열매들이 농부가 한 해 동안, 한 철 동안 땀을 흘리고 수고한 결실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농부이신 하나님 아 버지께서는 우리가 극 상품의 포도송이와 같은 인생이 되기를 원하신다. 썪고 병들고 시들고 말라 버린 상태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해야 했다. 그러므로 진실로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만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반면에 주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셨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니느라”(요15:6) 남아 있는 한해와 맞이할 새해와 앞날에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서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칭찬을 받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예수사랑 조회 89회 2025-12-12 23:03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 속량(贖良) 받은 자들(사35:1-10) 20251214 25.12.16 다음글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2:1-5) 20251130 25.12.01